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디트리히 폰 콜티츠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[[실레시아|슐레지엔]]의 [[융커]] [[귀족]] [[가문]] 출신으로 가문의 [[영지(역사)/유럽|영지]]인 [[https://de.wikipedia.org/wiki/Schloss_Gr%C3%A4flich_Wiese|그레플리히 비제 성]]에서 태어났다. 아버지 한스 폰 콜티츠는 [[프로이센]] 육군의 군인이었고, 숙부 헤르만은 1907~20년에 노이슈타트 [[군수]]였다. 1907년 드레스덴의 육군 사관학교에 입교하였으며, [[제1차 세계 대전]]이 발발하기 1달 정도 전에 [[작센 왕국]]의 보병[[연대(군대)|연대]]에서 [[사관후보생|장교후보생]]으로 복무하기 시작하였다. 1차대전이 발발하면서 보병장교로써 [[마른 전투]], [[이프르 전투]], [[솜 전투]], [[생캉탱 전투]]에 참전하였다. 이때의 전공으로 인해 연대에 배속된지 1년도 안 되어 [[소위]]로 진급, 대대 [[참모]]로 보임받았다. 1차대전 이후에도 [[독일 제국군]]에서 국가방위군으로 변한 군에 계속 남아 [[기병대]]에 복무하였다. 1937년에는 [[소령]]으로 진급하여 22공중강습사단[* 원래 22보병사단이었던 것을 공중강습사단으로 전환한 부대. 글라이더를 이용한 공중강습사단으로 일반적인 [[공수부대]]와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. [[폴란드 침공]], [[프랑스 침공|네덜란드 침공]], [[크레타 섬 전투]]에서 참여한 부대로써 주요 지휘관으로는 [[크레타]] 주둔군 [[사령관]]이었던 보병대장 [[프리드리히-빌헬름 뮐러|프리드리히 빌헬름 뮐러]]가 있다. 크레타 섬 전투 이후부터 종전까지 [[마케도니아]], [[세르비아]], [[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]] 등지에서의 [[파르티잔]] 활동을 진압하는 목적의 22 [[국민척탄병]] 사단(22. Volksgrenadier Division)으로 다시 전환된다.]의 16보병연대 3대대 [[대대장]]으로 근무하였으며, 1년뒤 [[중령]]으로 진급하였다. 1938년 [[주데텐란트]]의 [[뮌헨 협정|합병]]에 참여하였으며 1939년, [[폴란드 침공]] 당시에는 [[우치(폴란드)|우치]]와 [[브주라 전투|브주라]]에서 활약하였다. 1940년에는 로테르담 전투에서는 로테르담 시내로 향하는 주요 교가(橋架)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였고, [[공수부대]]의 전신이었던 공중강습부대의 항공기들이 착륙할 수 있도록 하였다. 로테르담의 폭격이 끝나고 나서 네덜란드의 항복에 대한 논의가 있던 중 [[쿠르트 슈투덴트]] 공군 [[중장]]이 총격으로 인해 머리를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.[* 완전한 [[헤드샷]]은 아니었고 유리창에 총알이 맞아서 파편에 머리 부상을 입었다. 이는 네덜란드군의 총격이 아니었고 [[팀킬|독일군 공중강습부대의 오인 사격이었다고 한다]].] 슈투덴트 장군이 장병들에게 인기있었던 장교였던 만큼 독일군 내에서 네덜란드 장교들에게 복수하자는 분위기가 일었으나 콜티츠가 이를 중재하여 학살을 막을 수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. 한편 네덜란드에서의 전공으로 [[철십자 훈장|기사십자 철십자 훈장]]을 수훈받고 대령으로 진급, 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. 1년 뒤 [[에리히 폰 만슈타인]] 장군의 11군 아래로 배치되어 [[바르바로사 작전]]에 참가하였다. [[세바스토폴 공방전]]에서는 4800명이었던 부대원 거의 전부를 잃었으며 자신도 팔에 총상을 입는 부상을 입는다. 이후 [[소장(계급)|소장]]으로 진급하여 260 보병사단을 지휘하게 되었으며 1942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[[쿠르스크 전투]]에서는 11기갑사단를 지휘하였다. 이 당시부터 [[러시아]]의 혹독한 기후 조건 때문에 평생 가는 순환계, 폐 질환을 앓게 된다.[* 2014년작 '디플로머시'에서도 몇번이나 이 질환으로 쓰러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.] 이 시기 그는 [[유대인]] [[학살]] 등 각종 [[전쟁범죄]]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보이며, 후일 여러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본인이 이 일을 '''"내가 수행한 것 중에 최악의 임무였지만, 그럼에도 가장 꾸준하게 해낸 것이 [[유대인]]의 몰살이었지. 난 그 임무를 철저하게, 완전하게 해냈네."'''라고 직접 말했다고 하며, 이런 사건으로 인해 후일 파리의 구원자라는 명칭에도 꾸준히 전범 논란이 따라붙게 된다. 1943년에는 다시 76기갑군의 군단장 대리로서 [[이탈리아 전선]]으로 옮겨져 연합군의 [[안치오 상륙 작전]]을 저지하는 데에 투입되었다. 1944년에는 연합군의 [[노르망디 상륙작전]]이 전개되면서 동부전선으로 또 다시 옮겨져 84군을 지휘하게 되었다. 1944년 8월, 보병대장(''General der Infanterie'')으로 진급하여 [[서부전선]] [[프랑스 군정청]]의 파리 광역권 [[군정]][[장관]](Kommandierenden General und Wehrmachtbefehlshaber von Groß-Paris)으로 발령받는다. 이 시점에 이미 [[나치 독일]]은 폭망 위기였기 때문에 [[아돌프 히틀러]]는 연합군에게 "[[파리(프랑스)|파리]]의 잿더미 외에는 적의 수중에 넘어가지 말아야한다."고 하며 파리를 파괴할 것을 명령하였다. 1일에 부임한 콜티츠는 투옥된 일부 [[레지스탕스]]들을 교외로 풀어주기도 하였으며, 주둔군 병력이 부족했던 탓에 레지스탕스들과 정전협정을 맺기도 하였다. 물론 정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레지스탕스들의 저항은 계속되었었다. 부임 일주일 뒤 쯤에는 히틀러는 계속 '''"파리는 불타고 있는가?"'''라고 계속 물어왔으나 콜티츠는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. 머지않은 25일에는 [[자유 프랑스]]군 [[필리프 르클레르]] 장군 및 레지스탕스에 콜티츠와 휘하 주둔군 만 7천여명과 함께 항복한다. 이때 '''파리의 구원자'''라는 평을 듣게 되었다. 이때 유명한 "히틀러를 배신할지언정 인류를 배신할 수는 없었다."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출처가 불분명하다.[* 당시 그의 휘하에 있는 장병들의 전의가 높지 않았다. 거기다 싸우면 패배할 게 뻔하고, 독일의 패전이 보이는 상황에서 히틀러 말을 듣고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었다간 전후에 전범으로 처벌될 것이 너무 뻔했다. 그래서 기왕 [[항복]]한다면 연합군에 좋은 인상을 남겨주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런 결정을 했을 거라고 보고 있다. 더구나 귀족 출신인 그에게 도시를 무차별로 파괴하는 것은 불명예스럽게 여겨졌을 것이다.] 되려 파리 내 레지스탕스와의 협정 도중 계속 저항활동을 이어간다면 주둔군은 탈출하지 않고 파리에서 방어전을 펼칠 것이며 도시를 파괴할 것이다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하였다. 이는 레지스탕스를 고깝게 여긴 콜티츠 본인의 견해가 반영된 표현이었다.[* 그도 그럴게 콜티츠에게 레지스탕스는 [[게릴라]]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. 게다가 콜티츠의 직위를 생각해보면 여차하면 자기도 레지스탕스에게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. 이와 반대로 미군을 위시한 연합군한테는 정중하게 대했는데, 항복 당시 미군 장교들에게 '''"[[미군]]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 될 만큼 충분한 공적을 쌓았소."'''라고 말하기도 했다. 미군을 잘 싸웠다고 치켜세우는 것이기도 하지만, 조국 독일의 본토까지 침공당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속내가 드러난 발언이기도 하다.] 도시 자체를 소중하게 생각하였다는 증언이 있으며, 한편 히틀러에 대해서는 "이러한 미친 놈에게 독일 국민의 운명이 달려있다니"라는 평을 남긴 적이 있다고 한다. 종전 후 [[영국]]으로 이송돼 다른 독일 장교들과 함께 포로로 지냈다가 나중에 [[미국]] [[미시시피]]주의 [[포로수용소]]로 옮겨져 수용되었다. 특별한 전쟁 범죄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2년 뒤인 1947년에 석방되었다. 석방 이후 1956년에는 파리 군정청을 비롯한 서부전선사령부, [[알프레트 잘베히터|서부해군집단군 사령부]] 등이 있었던 콩코드 광장의 머큐리 호텔에 다시 방문하기도 했다. 머큐리 호텔은 그 가운데서도 파리 군정청이 있던 곳이었으며, 당시 호텔 직원이 [[와인]]을 권했으나 사양하고 몇 분간 호텔 내부를 조용히 응시한 뒤 나갔다. 이후 전쟁 때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1966년 [[서독]] [[바덴뷔르템베르크]] 주의 작은 도시 [[바덴바덴]][* [[독일 분할]] 점령 당시 [[프랑스군]]의 관할이었다.]에서 사망한다. 비록 적장이었지만 지역의 장교 및 프랑스군 고위 장교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여하기도 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